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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바울의 간증

본문

사도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교회의 장로들과의 뜨거운 만남을 뒤로하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갑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배를 타고 가면서 바다라를 들러서 두로, 돌레마이, 가이사랴를 거쳐서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이 여정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듣는 것은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행 21:4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두로에 있던 신실한 제자들이 기도를 하면 성령께서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해로운 일을 당할 것을 알려주었다는 것입니다. 

가이사랴에 갔을 때에는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이스라엘에서 돌아와서 예루살렘의 분위기를 전해주었습니다. 바울의 허리띠를 가져다가 자기 손과 발을 묶으면서 하는 말이, “유대인들이 바울 당신을 이렇게 잡아서 로마법정에 세우겠다고 벼르고 있음을 성령이 알려주셨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바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행 21:13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이 말은 이렇게 해석됩니다.

“여려분 이렇게 걱정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걱정을 하니 제가 마음이 무겁습니다. 이 문제를 다르게 보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에서의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나를 체포하든 죽이든간에 그 사람들이 나한테 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것입니다.” 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앞으로 자기에게 닥칠 안좋은 일을 예감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각오하고 그 길을 갑니다. 마치 십자가에서 처형될 것이 분명한데도 예루살렘으로 가신 예수님이 연상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일이 일어나든 나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겠습니다!” 라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나서 바울을 걱정하던 사람들이 염려하던 그 일은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예루살렘에 있었던 유대인들은 바울이 나타나자 그를 비난합니다. 비난할 뿐만 아니라 거짓말로 바울을 고발하였습니다.

행 21:27-28: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유대인들은 바울이 유대사람들을 상대로 율법을 무시하고 정결예식을 무시하고 있다고 고발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거짓말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방사람들을 향해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무시하거나 유대의 관습을 철폐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초대교회에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두 종류가 있었습니다. 

한 그룹은 유대인을 중심으로 해서 예루살렘을 근거로 해서 시작된 히브리파 유대인들(Heberw Christian)들입니다.

다른 그룹은 시리아 지역의 안디옥을 중심으로 이방지역에서 예수를 믿게 된 헬라파 유대인(Hellenistic Christians)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그룹은 점점 헬라의 이방인들도 예수님을 믿게 되면서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습니다.


바울 같은 사람은 유대인의 혈통을 가지고 있었지만, 헬라의 문화와 언어에도 정통한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 지역이 아니라, 아시아 지역과 그리이스 지역에 다니면서 이방인들을 향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가지게 된 사실은, 이방인들이 유대교의 관습을 지켜야 하는가?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 등등의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고,

그래서 바울은 유대의 율법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게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롬 1:16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억울하게 체포된 바울은 사람들 앞에서 변명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행 21:40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 말로 말하니라.” 


바울의 변명이라고 되어 있는 이 본문은 변명이라고 보다는 변증입니다. 변증을 Apololy 혹은 Apologetics 라고 하는데, 자신의 신념이나 확신/믿음을 논리적으로나 경험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명한 플라톤이 쓴 책,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변증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예수를 믿고 변화되었다는 내용을 사도행전에서 3번을 간증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 세번 중에 하나입니다. (사도행전 9장, 24장, 26장)


왜 누가는 이 사도행전에서 똑같은 바울의 간증 이야기를 세번씩이나 반복해서 기록하는 것였을까요? 그것은 간증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간증을 빼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로 중요합니다. 

간증이 무엇이길래?

간증이라는 한자어는 干證 (방패간, 증명할 증) 입니다. 원래는 조선시대에 증인 증언을 의미하는 법률용어였지만, 지금은 거의 종교계에서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간증은 영어로는 testimony 라고 하는데 증언이라는 말입니다.

간증은 사람이 자신의 종교적 체험을 고백하면서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나타내거나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는 이야기입니다.

사도바울도 자기가 하나님을 만난 이야기를 사람들 앞에서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자신이 보고, 들은 것, 깨달은 것, 그리고 경험한 것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도바울과 같은 특정인들만 간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다 간증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다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분들을 보면, 몇가지 동기가 있습니다.

가장 평범한 예는, 힘드니까, 외로우니까, 불안하니까, 궁금하니까 등등이지요.

사는게 힘들어서 신의 도움을 받고자 신앙생활하는 사람도 있고,

사는게 고독하니까, 교회 공동체에서 사람을 사귀는 일도 있고

인생이 불안하니까, 죽음이후에 뭐가 있는가 불안하고 걱정되니까 신앙생활을 시작하기도 하고, 진리추구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자 깊은 종교의 세계에 심취되는 경우 등등 다양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런 분들이 믿는 사람들의 간증을 들으면서, 하나님에 대한 사실을 전달받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이런 간증, 증언하는 일들이 많이 있어야 좋습니다.


사도바울도 많은 불신자들 앞에서 자기가 경험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어떤 이야기를 하는가?

첫째, 자기가 왜 복음을 전하고 있는지를 이야기 합니다.

1-2절 “1 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그들이 그가 히브리 말로 말함을 듣고 더욱 조용한지라 이어 이르되” 

바울은 성전에서 정결의식을 끝내고 나오는 도중에 억울한 누명을 썼습니다. 하지도 않은 일을 뒤집어 씌워서 군중심리로 바울을 붙잡아서 집단으로 린치를 가합니다. 

오늘날로 치면, 교회 예배 잘 드리고 나왔는데, 같이 예배 본 다른 교인들이 저 집사는 어쩌구 저쩌구 막 이야기를 하면서, 없는 얘기를 지어서 거짓말을 하고, 심지어는 집단 왕따 내지는 구타를 하는 것입니다. 


집단 구타를 당하는 바울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로마의 천부장이 사태를 감지하고 군대를 풀어 군중 속에서 바울을 구출해 냅니다. 그리고 바울을 군대 병영으로 옮겨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바울은 천부장에게 이야기를 해서 자기가 유대인들에게 말할 수 있는 시간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천부장은 바울이 헬라말을 할 줄 아는 것을 보고 무식한 사람이 아니라 상당한 학식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고 이야기 하라고 허락을 합니다. 


바울은 계단에 서서 히브리말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하더라.” 

변명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자신에 대해서 변명을 한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자기의 신앙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억울한 상황에 있었지만, 이 간증에서는 한번도 자신이 억울하다거나 상황이 어떻게 되었다거나하는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경찰서에 가면 죄인으로 잡혀온 사람들이 흔히 하는 이야기, “너 내가 누군지 아냐? 너 내가 누구 누구의 조카고, 내가 전화 한번만 하면 너는 죽었다.” 뭐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환경의 어렵고, 힘든 것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관심은 언제나 복음증거에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주의 복음을 전하겠는가? 이것이 바울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유대인들에게 매를 맞아도, 감옥에 갇혀도 그게 바울을 흔들어 놓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비록 지금 구타당한 상태에 있었지만, 그는 이 시간 조차도 하나님을 증언하는 기회로 삼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처한 모든 환경을 하나님을 있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우리들의 가장 큰 관심은 무엇입니까? 먹고 사는 문제, 비즈니스 문제, 가정문제, 자녀문제, 학업문제에 등등 우리가 관심을 갖는 많은 분야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런 것보다 하나님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관심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관심을 갖고 열심히 일을 해야합니다. 다만 그것이 전부라면 우리는 곧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허망한 인생인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애쓰고 수고하면서 노동하는 일들, 우리가 그 일만 한다면 너무 불쌍하지 않습니까? 

먹고 살려니까 어쩔 수 없는 노동으로만 여긴다면, 우리는 일하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에 불과할 것입니다.

자녀들이 소중하지만, 자녀에게만 집중하고 있다면, 나중에 자녀들이 둥지를 떠나고, 혹 부모가 키워준 정성도 잊어버리게 된다면 그 섭섭함이 우리를 또 슬프게 할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관점이 달라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해서 살면, 실패가 없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능력이 있는 사람이 되고, 가장 중요한 것,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이 산다면, 부지런히 일하지만 기쁨이 없고, 열심히 공부하지만 의미가 없는 삶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비즈니스를 하는 목적도 돈을 버는 것만이 목적이 된다면 돈을 벌지 못하면 비참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비즈니스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겠다고 맘을 먹고 하면, 돈을 벌 때도 하나님의 영광, 돈이 안벌려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 중인 줄로 믿습니다. 


공부를 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좋은 대학, 좋은 직업을 찾기 위해서 공부를 한다면, 그렇지 못한 상황이 오면 그는 좌절할 것입니다. 그러나 공부를 하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힘을 낼 것입니다. 


몇 년전에 제가 어느 청년에게 한가지 부탁을 한적이 있습니다. 교회 연합집회에서 특송을 불러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특송을 하기로 한 날에 지독한 독감이 걸려서 노래는 고사하고 말도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다가 그 다음날에 정말 중요한 시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몸도 아프고 목도 아픈데, 그날 노래를 하려고 왔어요. 

사실 저는 ‘너 그냥 집에 가고, 좀 잘 추스리고 내일 시험 잘 봐라’ 그렇게 얘기하려고 했는데, 

자기는 그 상황에 대해서 ‘목사님이 말한게 하나님이 말하는 거라고 믿고 왔다’는 겁니다.

그리고 특송을 하고 집에 돌아갔습니다.

다음날 시험을 봐야 하는데,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몸이 너무 아파서 시험을 취소했답니다. 수험료도 몇백불 손해 봤답니다.

제가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 청년이 저를 위로하더라고요.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두말하면 잔소리이지요. 놀랍고 신기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목사인 저보다 훨씬 믿음이 좋아요. 매사가 그래요. 하나님일이라면 만사 재쳐두고 그 일을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그를 복 안주면 그 하나님은 이상한 하나님 일 것입니다. 

지금도 그 청년을 위해서 계속 기도합니다. 저는 그 청년이 잘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붙잡고 들어 사용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일, 문젯거리가 생겼을 때, 문제만 바라보면서 ‘문제가 있어서 큰일’이라고만 한다면, 그 문제는 계속 우리를 괴롭힐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를 뛰어넘어 하나님에게 시선을 맞추면, 그 힘든 문제와 고민거리는 언제 해결됐는지 모르게 지나갈 것입니다.


둘째, 자신의 강점을 사용했습니다.

3절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바울은 간증을 하면서 자신이 가진 배경을 간단하게 소개합니다.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자랐으며,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은 사람이었다고 소개합니다. 개인적인 자랑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강점을 사용하려는 것입니다. 


행 21장 37절에 보면 바울이 천부장에게 부탁할 때는 헬라말로 말했다. 

“바울을 데리고 영내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 이르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그리고 난 다음 계단에 섰을 때에는 유대인들에게 히브리어로 이야기를 합니다. 

행 22: 2절 “그들이 그가 히브리 말로 말함을 듣고 더욱 조용한지라 이어 이르되” 


이중 언어를 통해 이 사람에게도, 저 사람에게도 모두 의사전달과 호의를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심지어 간증이 끝나기도 전에 유대인들의 소동이 일어나자 그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바울을 채찍으로 치려고 하자 자신이 로마시민권자임을 드러냅니다. 


24-25절 “천부장이 바울을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고 그들이 무슨 일로 그에 대하여 떠드는지 알고자 하여 채찍질하며 신문하라 한대 / 가죽줄로 바울을 매니 바울이 곁에 서 있는 백부장더러 이르되 너희가 로마 시민된 자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하니” 


백부장이 이 이야기를 듣고 천부장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습니다. 그러자 천부장이 바울에게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는데 너는 어떻게 얻었느냐?”고 물었을 때 바울은 자신은 “나면서부터 로마시민권자”라고 이야기 합니다.

바울은 이런 능력과 자격을 자신을 자랑하고자 이야기 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가 가지고 있는 은사, 경력, 경험을 필요로 하는 때와 장소에서 적절하게 사용하였습니다. 


주님은 바울의 이중 언어를 쓸 수 있는 능력을 활용하시고, 로마시민권도 활용하시고, 율법에 대한 지식도 그대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은사를 잘 활용해야 합니다. 

가끔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는 분들 중에서, 자기 일을 다 때려치고 주의 일을 한다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잘 분별해야 합니다. 선교사로 일하겠다거나, 목회자가 되겠다거나 할 때는 특별히 더 신중해야 합니다. 그 일은 정말 다른 일을 다 때려치고 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보다 많은 경우는 현재 하고 있는 일 중에서 시간을 좀 더 내고, 조금 희생하고, 수고하고 하면서 주의 일을 해야 할 때가 더 많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는 일단 잘 아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잘 알고 있고, 잘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업하는 일도 마찬가지이고, 교회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부분을 기쁘고,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잘 모르는 부분을 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때는 배워서 하면 됩니다. 

오늘 교육하는 시간이 있는데, 바로 이것입니다. 

일을 맡았는데, 뭘해야할지 모르는 분들을 위해서 교육과 훈련의 시간을 드리는 것입니다.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분은 어떻게 해야할까요?

잘 웃어주기만 해도 사람을 기쁘게 합니다. 똑 같은 사람이라도 웃는 얼굴과 안 웃는 얼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밝게 웃고, 환하게 웃는 미소가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준다. 


셋째, 은혜의 순간을 기억하고 고백합니다.

7-8절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내가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에 바울은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율법의 엄한 교육을 받아 율법에 열심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박해하였고,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을 옥에 잡아 가두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난 후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을 가장 존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떤 일이 있었나요? 주님의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과 만난 후가 구별이 됩니다. 

위대한 인물들의 생애를 보면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과 이후가 분명하게 구별이 됩니다. 


영국을 뒤집어 놓은 조지 휫필드는 15살 때까지 술집 바텐더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수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5만 번이나 기도응답을 받았던 조지 뮐러는 과거에는 좀도둑이었다고 합니다. 동네가 다 아는 도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도둑이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기도의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까지도 기도로 구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위대한 인물들만 아니라 우리 개인들도 간증의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열정과 나에게 주시는 재능과 은사를 잘 활용하는 것과 예수 만난 다음의 인생의 변화를 자꾸 증거해야 합니다. 


예수 만난 그 은혜를 기억하고 선포할 때 우리는 다시 힘을 내게 됩니다. 고난과 역경 가운데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실망하지 않고 일어납니다. 사망의 어두운 그림자 안에서도 그리스도의 빛으로 걷게 됩니다. 


흔히 눈물젖은 빵을 먹어본 사람이 인생을 안다고 이야기 합니다. 가장 어려울 때를 기억하는 사람은 인생의 깊은 맛을 체험한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그것을 이야기 하면, 그 사람은 결코 실패자가 아닙니다. 인생의 성공자요, 승리자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처럼 우리들도 입을 열어 간증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내 인생을 다시 한번 살고 정리하시고, 하나님을 위해서 여러분의 재능과 은사와 가진 것을 잘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은혜의 순간을 꼭 기억하시고, 어떤 상황과 환경속에서도 승리하시고 하나님의 영광 드러내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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