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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법정에 선 바울

본문


지난 주에살펴본 말씀, "바울의 간증"에서 

바울은 자신을 괴롭히고 구타한 유대인들 앞에서 1) 자신이 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지를 설명하고, 2)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장점을 잘 활용하고 3) 그리스도를 만난 간증을 되풀이하면서 상황을 감당하는 모습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바울의 간증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들도 어떠한 상황에서도 복음을 전하고, 내가 만난 주님을 증언하시고 나가면 능력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 바울은이 간증을 하고 나서 로마의 법정에 서게 됩니다.

아마도 그 상황은 누구든지 고통스럽고, 피하고 싶은 상황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고 했지만, 인간적으로는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을까 생각을 해보게됩니다.

이 상황에서 바울이 행한 것은 무엇일까요? 네, 여전히 그리스도의 복음을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4번 재판을 받습니다.

첫번째 재판은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행 22:30-23:10), 

두번째 재판은 로마총독 벨릭스 앞에서(행 24:23), 

세번째 재판은 벨릭스를 대신해서 로마총독이 된 베스도 앞에서(행25:1-12), 

그리고 마지막 네번째 재판은 아그립바왕 앞에서(행 26:1-32) 받습니다.

 

4번의 재판을 받게 되면서 한가지 공통점은 그 재판을 하는 사람들이 공평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아이러니한것은, 종종 선한 사람들이 불의한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당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도바울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산헤드린공회에서 재판을 받을 때에, 대 제사장 아나니아가 고발을 합니다. 아나니아는제사장이었지만,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을선동하면서 바울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데, 오히려 이방인인 천부장이 바울을 살려내어서 가이사랴로 이송을 보냅니다. 그이유는 천부장은 사도바울이 로마의 시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자칫 로마시민을 유대인들에 의해서 부당하게재판하게 될 경우 책임을 져야하는 부담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당시 가이사랴에 주둔해 있던 로마의 총독 벨릭스에게 보낸 것입니다.

천부장은 유대 총독 벨릭스에게 이렇게 서신을 보냅니다.

“글라우디오루시아는 총독 벨릭스 각하께 문안하나이다

이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잡혀 죽게 된 것을 내가 로마 사람인 줄 들어 알고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여다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알고자하여 그들의 공회로 데리고 내려갔더니 고발하는 것이 그들의 율법 문제에 관한 것 뿐이요 한 가지도 죽이거나 결박할 사유가 없음을 발견하였나이다.” (행 23:26-29)

 

그후에 바울은 벨릭스 총독앞에서 재판을 받습니다.

벨릭스(Felix)는 어떤 인물일까요? 로마 역사가 타키투수(Tacitus)는 벨릭스에 대해서 “가장 돈에 욕심이 많았던 사람이며, 가장 더럽고, 가장 무능한 정치인”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타락한 정치인, 출세를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 

그는 원래 로마의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어머니의 종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이 노모의 환심을 사서 노예에서 자유인이되었고, 결국 왕권에 가까이 가게 되었는데, 이 때 음란한 놀이를 가르쳐 주면서 왕의측근이 되었고, 결국 로마총독에 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후에 권력 남용과 부정 축재 등을 이유로 해서 그는 다시 노예로 전락하게 됩니다. 불의한 재판관, 인정할 수 없는 재판관 앞에 서서 사도바울은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런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나는 믿음가지고 말씀대로 산다고 하는데, 오히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와서 비난을 하거나, 부당하게 공격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더구나 이러한 사람들이 혼자서 오는게 아니라 무리를 만들어서 옵니다. 그때에는 두려움이 있고, 공포스럽기 까지 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입장에 있었던 것입니다. 법정에 섰을 때, 더군다나 피고소인으로 법정에 서 있을 때, 내편을 들어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온통 비난하는 소리만 들릴 때, 그럴 때 얼마나 무섭고 떨렸을까? 솔직히 이런 입장에 있을 때, 누군가 내 사정을 알아주고, 억울한 심정을 들어주고 이런 사람이 있으면 참 좋겠는데, 그런 사람은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떻게 했을까요?

바울은 혼자 묵묵히 자기를 변호할 뿐이었습니다. 두려워하지도 않고, 투덜대지도않고.

자기가믿는 것, 자기가 살아온 것. 그것만 담담히 증언할 뿐이었습니다. 바울은 그저 자기가 한 이야기, 자기가 한 행동을 설명하고, 판단은 알아서 하도록 할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을 믿고, 그냥 나아간 것입니다.

사람들에 의해서 흔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 대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해서 염려, 불안, 걱정하지 말기를 축원합니다.

그 사람보다더 많은 사람이 내편이라서 이기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알아주시고,어차피 이끌어 가시는데, 나 혼자 이 길을 걷는다고 하더라도 흔들리지 말고,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실 이재판을 받고 나서 벨릭스는 바울이 무죄인 것을 알았지만, 선고를 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의 환심을 사고 싶어서, 이 일을 통해서 정치적으로 무슨 이익을 얻을까를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행 24:27 “이태가 지난 후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이어받으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그후에 2년이 지난 후에 벨릭스는 파면되고 후임으로 베스도가 로마총독으로 가이사랴에 오게 됩니다. 바울은 2년 동안 판결이 나지 않는 가운데 미결수로 감옥에 그대로갇혀 있었습니다. 

 

지루하게 생각되는 이 시간 동안에 바울은 말씀을 붙잡고 때를 기다립니다. 

“베스도가 부임한 지 삼 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새

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더라” (행 25:1-3)

 

“베스도가 부임한 지 삼 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새로운 총독이 부임했습니다. 총독으로 부임한 지 3일 만에 예루살렘으로올라가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예루살렘으로 간 이유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올라갔던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 새” 

유대인들이 여전히 바울을 죽이려고 계획하며,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바울에게 더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눈도 끄떡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눈 앞에 펼쳐지는 환경보다 말씀을 붙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3장 11절에 보면, 바울은 2년전에 이런 일을 경험합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 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 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라는 말씀을 받았는데, 바울은 이 말씀을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사명이 생긴 것입니다. 즉 로마에 가서 복음을 증거하는 것임을 받은 것입니다. 

 

그후에 그는 아그립바 왕 앞에서 마지막 재판을 받게 됩니다.

이 재판에서 사도바울은 마지막으로 간증을 하고 설교를 하게 됩니다. 

 

아그립바왕앞에서그는 무슨 이야기를 할까요?

1.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증언합니다. 

9-12절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 투표를 하였고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한과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행 26:9-12)

 

바울은 회당에서 채찍질을 하였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였고, 그들로하여금 ‘예수를 부인하거나 저주하는 말’을 하도록 괴롭히고고문하다가 그것도 모자라서 다메섹과 같은 다른 지역까지 쫓아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러 가는 그런 사람이었다고 자신을 이야기 합니다. 

예수 믿는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은, 예수믿기전의 모습에 대해서 부끄러워하고,회개하고, 잘못을 고백합니다. 

저는 그것이 마음을 깨끗이해서 하나님의 영을 받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처럼 실제로도 죄가 있어서 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심령이 깨끗해 지면서 과거에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다 부끄럽고 죄스러워지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시작했는데, 과거의 자신의 모습이 회개되지 않으면, 정말내가 예수의 사람인가를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2. 그러면서 예수를 만난 후 변화된 자신을 간증합니다. 

13-15절 “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우리가 다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내가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 26:13-15)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로 바울은 변화되었습니다. 

교회 안에아무리 오래 있어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삶의 변화가 없습니다. 우리 신앙생활 하면서 사람들만보여서는 안됩니다.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 목사님만 보이고 예수님이 안보이면 안됩니다. 

복음의 열정을 잃어버리고, 신앙의 열정을 잃어버리는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언제부턴가 예수님을 만난 기억이 희미해지면서부터입니다. 

 

바울은디모데전서 1장 13, 16 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딤전 1:13, 16)

 

전에는 비방자, 박해자, 폭행자였으나 이제 주님을 만남으로써 영생을얻는 자요 생명을 얻은 자로 변화되었다고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은 예수 만나기 전과 만난 후로 바뀌었다고 고백하는게 정상입니다. 여러분의 고백은 어떠하십니까?

 

3.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행 26:24에 보면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라고 나옵니다.

바울이이렇게 간증을 했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베스도 총독이 간증을 듣고 하는 이야기가 “미친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위축되지 않고 계속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25절: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바울은 로마총독 앞에서도, 아그립바 황제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복음을 전합니다. 

우리에게 전파된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렇게 전해진 것입니다.

딤후 4:2에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힘쓰라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게하며 권하라.”라고 했습니다. 

누가 뭐라고하든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하든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담대하게 복음을 전한 사람들 때문이었습니다. 

목숨을걸고, 어떤 세상의 권세들에게도 굴복하지 않는 사람들이 전한 복음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까? 아마 누가 전도하는데, 와서욕을 하고, 멱살을 잡으면 우리는 그만 둘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사도 바울도 그것이 두려워서 그만 두었다면, 예수의 생명의 복음은 전파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분란이있는 교회를 가만히 관찰해 보면, 교회에서 피튀기게 싸우는 사람들을 보면, 바깥에서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만 큰 소리 치는 것이지요.

 

그러나 세상에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아니 문제를 일으킬수가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데, 교회에서 은혜로 충전되지 않으면 복음을 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교회는 자연스럽게 은혜의 교회가 되는 것이고요 복음을 전하지 않는 교회는 은혜가 떨어지게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삼일절 백주년 기념예배로 드립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대한민국이라는 조국이 주어진 것은.

백년전 우리의 조상이 목숨을 걸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것이

밀알이 되어서, 독립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비폭력 저항 운동이었던 삼일운동임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무력으로 제압하였고, 수많은 희생자가 나왔습니다. 그 당시의 통계에 따르면, 삼일 운동으로 인해서 7,000여명의 사망했고, 16,000여명이 부상, 47,000명이 투옥되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기독교인들의 숫자는 약 20만명, 전체 인구의 1%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삼일운동으로 희생당한 7,000명 중에 기독교인은 약 30% 정도가 되었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유관순 누나, 1902년에 태어나 1920년에 순국한 18세의 소녀였지만,

그 짧은 인생을 누구보다도 더 강렬하게 살았던 우리들의 영원한 누나이지요.

그 유관순은 감리교 선교사 엘리스 샤프의 추천을 받아서 이화학당 보통과에 진학하게 되었고, 만세운동에 주동자로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반의 고된 투옥끝에 순교하고, 

정동감리교회에서장례식을 거행했습니다.

우리의 조국은 그들의 희생과 죽음으로 얻어진 것이었습니다.

모진 고통과 고문과 핍박이 있었지만, 부러질 지언정 구부러지지 않는다는 정신을 가지고 나라의 독립을 외친 우리의조상들이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시대에 사명이 있는 줄 믿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는 일에 우리 다 쓰임 받기를 바랍니다.

 

예수믿으면서 예수님 한테 미쳤다는 소리 한번 들어야 되지 않을까요?

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저 집사님은 예수한테 미쳤어 이 소리 한번 들어야 되지 않겠어요? 

세상에서도 무슨 일에 미쳐서 하는 사람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비즈니스도 미친듯이 하고

공부도 미친듯이 하고

열정을 가지고 해야 성공할 줄 믿습니다.

신앙생활도 그런 열정을 가지고 한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법정앞에선 바울은

아마도 세상의 법정에서 하나님의 법정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눅 12:8)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면, 하나님도 인정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를 끝까지 붙잡아 주시는 주님을 믿고 담대히 나아가 승리하시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마 10:28)

 

혹, 여러분들 세상의 세력들이 우리를 법정에 세워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시험을 당하게 된다면, 강하고 담대하게 이겨 나가시고, 

주님을 간증하시고,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변화시키시고, 하나님의자녀로 삼아 주신 주님을 의지하고 믿으면서 하나씩 하나씩 감당하시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바울과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셔서 세상이 어찌할 수없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주의 군사, 십자가의 군사가 되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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